설렁탕 쇠머리, 쇠족, 쇠고기, 뼈, 내장 등을 모두 함께 넣고 장시간 백숙으로 푹 고아서 만든 곰국. (곰탕에는 소뼈가 들어가지 않는다)
설렁탕의 유래
1. 선농단에서 유래했다는 설
조선 시대에 임금이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제사를 지냈던 선농단에서, 행사 후 만든 고깃국을 선농탕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
그러나 이 설이 등장한 것은 1924년에 신문기사에 처음 등장하고, 조선 시대에 쓰인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이나 일반 문헌에서는 존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농업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소가 굉장히 귀했기에 국가 단위에서 소를 잡는 것을 금기시하였으며, 더군다나 친경이라는 매우 엄한 규범에 따라 진행되는 행사에서 왕이 직접 부리는 소를 잡아서 국을 끓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조선요리학이라는 책에는 설렁탕의 어원에 대해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을 할 때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할 형편에다 배고픔에 못 견디어 친경 때 쓰던 농우를 잡아 맹물에 넣어 끓여서 먹으니 이것이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매년 음력 2월이 되면 대신들을 이끌고 선농단에 나가 제사를 지내고 몸소 밭을 가는 시범을 보이며 농사의 소중함을 알렸다 하여 선농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세종 때 작성된 '오례의'에 선농제에 관한 의례가 실리긴 했으나 실제 친경을 나가진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설렁탕의 기원에 다시 물음표가 달렸다. 왕의 친경은 '국조오례의'가 편찬된 이듬해인 성종 6년(1475)에 이르러서야 처음 시행되었고, 백성들에게 국밥과 술을 내렸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증거가 비록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록으로 등장하였지만, 많은 일반인들이 정설로 알고 있는 설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다른 설들도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가장 그럴듯한 스토리가 있는 이설이 지지받고 있다.
제기동의 설렁탕 식당들 중에는 아예 선농탕이라는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도 하며, 동대문구에서 운영하는 제기동 선통단 역사문화관 역시 선농단이 설렁탕 기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 몽고 고기죽 술루에서 유래했다는 설
육당 최남선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소와 양을 삶은 음식을 공탕이라고 적고 몽고어로 술루라고 읽는다. 이것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공탕은 곰탕으로, 술루는 술루탕을 거쳐 설렁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3. 이문설농탕에서 유래했다는 설
설렁탕을 상업적으로 파는 가장 오래된 가게인 이문설농탕에서 유래했다는 설로 눈처럼 희고 진한 국물이라는 의미로 요리를 완성한 뒤 모습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는 것으로 모음동화로 설농탕이 설넝탕이 되고, 자음동화로 설렁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4. 국물을 오랫동안 설렁설렁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
설렁탕과 곰탕의 차이
요즘엔 곰탕과 설렁탕의 구분이 없어지는 추세지만 원래의 차이점이라면 설렁탕은 주로 뼈, 곰탕은 주로 고기로 국물을 낸다. 설렁탕과 유사한 음식인 사골 곰탕은 가정에서 주로 뼈를 고아 만든 진한 국물
설렁탕
설렁탕은 뼈와 함께 쇠고기 살코기와 머리고기, 내장, 도가니, 족 등으로 만들고 기름을 걷어 내어 좀 더 담백한 맛을 내며 뽀얀 우윳빛을 낸다
곰탕
곰탕은 양지머리, 사태 등과 양, 곱창 등 내장을 넣고 끓이며 무, 다시마, 대파등을 곁들여 좀 더 기름진 맛이 난다
서양에서도 소뼈로 육수를 내는데, 보통은 뼈를 한번 구운 뒤 끓이기 때문에 국물 색깔이 누런 편으로 스튜를 끓이거나 한다.